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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白吏(청백리) 梧里(오리) 李元翼(이원익)과 觀感堂(관감당)
靜庵(정암) 趙光祖(조광조)와 深谷書院(심곡서원) 기행문
한얼문화탐방회 회장 이 규 엽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18년 0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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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창녕신문 |
| 선현들의 인물 학문 사상 철학이 서려있는 옛 유허지와 유적을 탐방하며 선현의 학문 사상을 이해하고 역사를 배우는 동호인이다 8월 더운 날씨에 아침 일찍이 오늘의 탐방 일정에 설레면서 전세차 중에 반가운 회원의 근황과 정담을 나누며 경부고속가도에 전답의 풍성한 농작물과 산천의 신록을 차창으로 즐겼습니다 오전에 광명시 오리 이원익 정승 유적지에 도착하니 관감당 종가 는 산업화와 도시팽창으로 온통 apt와 고층 건물에 쌓였으나 400 여 년 전의 고전 전통가옥 등 청백리 가문과 개인의 영광의 정서가 잘 보전되었다 오리 이원익(1547-1634 88세)은 태종의 12자 익령군의 4세손 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 걸쳐 재상을 지냈으며 키 작은 오리 정승으로 알려져 있다 황희 정승에 가려서 알려지지 못했으나 5번 영의정 50 여 년 관직생활로 조선조 최고의 재상이다 너의 아버지 (咸川君李億載)는 전 후 고을을 맡을 때마다 청렴으로 백성을 보호 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아들이 마음을 새겨 집안명성을 당부하므로 명심하고 근검 효경 후덕 인의를 실천하여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재임중에 투철한 책임감과 애민정신으로 대동법시행으로 백성의 세금을 덜어주고 임진왜란 때 四道都體察使(사도도체찰사)로 군무 총괄하며 전란을 극복하였으며 광해군 패륜에 신변위험을 무릅쓰고 대비효도 형제우애 여색근신 국가재정절감 등 극언상소 뒤 임해군 처형을 극력반대하고 병 이유로 귀향 또 인목대비 패위 극력 반대 로 탄핵되여 홍천 여주에 유배 인조 때 영의정으로 광해군 처형을 극구 반대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나의 잘못이다 나도 같이 사약을 달라 광해군목숨을 부지 등 많은 업적이 있고 소박하고 과장 할 줄 모르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청빈하게 살아 致仕(치사) 후 비가 세는 두 칸 초가집에서 생활하니 인조로부터 관감당과 ?杖(궤장) 을 하사받고 인조묘정에 배향되었다 관감당 오리영정 충현서원지 종택은 문화재이고 조선시대 선비의 담백한 옛 풍류도 볼 수 있다 충현전시관에 보물 이원익 영정 친필 교서 궤장 제기 등을 전시 하고 경기도 전통종가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1604선조37 이원익이 아내 영일정씨 죽음 棺(관) 앞에서 죽음을 애도하는 輓詞(만사) 친필 보존 문화재 251 悼亡(도망) 상투틀고 쪽 찔러 부부가 된지 지금 와서 여러 해가 지났 구려 벼슬하려 사방을 다녔으니 또 어찌 슬픈 일에 서러워야 하는냐 독수공방하는 날 얼마나 많았든가 이승과저승이 둘다 유감은없으나 한 방에 함께 한날이 며칠 이었는가 자녀들이 모두 곁에 있구나 게다가 난리도 겪고 병도 앓았지 않는가 나는 병에 시달리며 아직 죽지를 않고 십여년 동안을 혼미하였으니 지루하게 숨만 쉬고 있노라 캄캄하다 온정이 끊어진 것 널을 어루만지며 그대를 떠나 보내니 타고난 천성은 본래 순박하였으니 그대 할 일 다 마친 것 부럽소 평생에 악한 짓 하지 않았다 그대를 따라 갈 것 몹시 원하지 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세상에 오래 사는 것 원치 않으니 이 사람이 이런 액을 만났을까 황천에 혹시나 서로 다르게 되면 난리 속에 이리 저리 피해 다닐 때 업보의 인연 응당 이전과 같으리 망자를 보내면서 부부회로에 사랑이 부족함과 슬픔의 만사 는 순수한 감명을 느낀다 다시 안양시 심곡서원과 정암 조광조 묘역에 도착하니 이 곳도 산업화 도시 팽창으로 apt와 고층 건물의 도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심곡서원(문화재530)은 1650효종1 사액현판을 받고 대원군 때 미훼철 47개소 중이며 道學書院으로 前學後廟(전학후묘) 구도로 규모가 크지 않고 간결한 건축과 강학당은 창건 500여년의 고옥 으로 講學懸板(강학현판)글씨는 김종수(1728-1799) 좌의정 노론 영수이고 정조의 스승이다 건축물은 여러 차례 중수 중건하였으며 서원과 묘역부지는 떨어져 있으며 넓고 조광조가 직접 심은 느티 나무와 은행나무는 노거수으로 우람했다 묘역는 야산에 남향에 안치 묘비가 있다 종중 선영도 함께 있었다 우암 조광조(1482-1519 37세)는 부친의 임지에 따라가니 갑자 사화 때 회천에 유배중인 환훤당 金宏弼선생에 수학하여 장원급제 로 출사하여 官至 대사헌이 되어 중종반정 이후 중종의 신임을 얻어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일신하고 급진개혁 실현으로 풍속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고 미신을 타파하고 과거급제 없이 현량과 를 신설하고 젊은 인재를 등용 요직안배하고 사림세력을 육성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위훈삭제 등으로 중종반정공신인 훈구세력을 공격하고 부정을 정리하여 나라를 덕과 예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으로 급진개혁의 왕도 실현을 추구하다 洪景舟 南袞 沈貞 등이 走肖爲王 무고로 기묘사화에 사림파의 대대적인 숙청 으로 능주에 유배 후 賜死(사사)하였다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 낸 반정공신 공격은 마당치 않아 왕권강화로 기묘사화에 이런다 이후 선조 때 신원과 영의정에 추증된다 사람들은 너무 날카롭고 급진적 이였든 개혁가로 못다 핀 개혁 의 열망은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37세 젊은 정치인으로 사라 졌다 조선시대 선현의 청백리 사상 나라를 덕과 예로서 다스리는 이상적 儒學(유학)을 이해하고 유현의 봉안 봉사와 후진 양성의 서원교육시설을 답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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