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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근대역사문화 답사에서 본 것들 (1)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19년 07월 12일
지난 6월 8일, ‘남지를 사랑하는 사람들’(공동대표 이동안, 박태명, 이상주, 김부열 남지철교지킴이) 회원 20명은 요즘 빅이슈가 된 목포지역 정기답사를 실시하였다. 목포를 답사지역으로 정한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 창녕에서 목포와 비슷하게 일제의 침략성과 경관이 남아 있는 곳에서 성장한 우리 회원들이 일제의 침략현장을 직접 목격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근대문화유산이 점점 사라져가는 남지와 달리 역사문화공간의 보전과 도시재생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살펴보고 벤치마킹하자는 의도였다.
출발하면서 일제의 침략과 민족의 저항이라는 구도로 답사코스를 잡았지만, 일정을 고려하여 치밀하고 거센 일제의 침략에도 철저하게 맞서 항거한 사람과 흔적을 먼저 찾았다.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선교사 사택 답사에서 바쁘심에도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신 최병기 목사님의 안내를 받았다. 1898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에 의해 설립된 목포양동교회는 1919년 3월 21일에 일어난 목포 3·1 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근대사에서 교회의 역할은 너무나 엄중하고 크다. 서학의 학문적 수용으로 받아들인 천주교와 근대문물과 함께 전파된 개신교는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수많은 박해와 순교를 거치고 3.1운동과 신사참배거부로 모진 일제의 탄압 속에서 당당히 민족정신과 종교적 신념으로 극복해왔음을 목격하는 답사였다.
비종교인에게 친절하게 전하는 목사님의 목소리는 차라리 애국심을 강조하는 낭독처럼 들렸다. 당시, 양동교회는 사랑과 남녀평등을 외친 선교사들도 남녀가 유별한 조선을 이해한 듯, 남녀 신도의 출입문을 따로 만든 것은 문화적 이해와 배려가 아니었나 싶었다. 예배당 왼쪽 출입구 위에는 태극문양과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이라는 한자와 오른쪽 출입구에는 “쥬강성일천구백십년”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라를 빼앗긴 경숙국치의 모욕과 탄압 속에서 민족성을 지키려는 듯 1911년 준공을 하며 굳굳이 새겨 놓았다.
양동교회는 가난과 무지와 질병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던 교회로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여 암울한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었기에, 들불같이 일어난 3.1운동이 각계각층으로 파급되게 하는 진원지가 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
양동교회 근처에 세워진 정명여학교(현 정명여자중?고등학교)는 양동교회를 세운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에 의해 ‘목포여학교’로 설립되었다. 1911년 정명여학교로 개칭을 하였다. 목포는 1897년 개항과 함께 전남에서 가장 먼저 선교사에 의한 근대 교육이 시작된 곳이었기에, 3.1운동에 두 남장로교 미션스쿨인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의 참여가 두드러졌다고 한다.
특히 3.1운동 시위 모두에 참여한 정명여학교 여학생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가장 당당하고 거침없는 결기를 보여주었으며, 형벌을 받은 인원도 가장 많았다 한다. 이것은 양동교회에서 신앙심으로 결사체가 되었고, 목포 개신교인은 신앙인이 되는 것과 애국자가 된다는 것, 즉 창조주가 모든 민족에게 스스로 통치할 권리와 자유를 부여하셨다는 교리적 당위를 실천하게 한 선교사의 힘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답사한 건물은 느티나무와 숲이 잘 가꾸어진 곳으로 1912년 화강석을 이용해 선교사들의 사택용으로 지은 건물로 일반적인 붉은색 벽돌을 이용하지 않고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화강석으로 지은 건물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고 한다.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신앙이 모체가 되어 민족과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 참여를 이끌어 낸 교육의 공간에서 선교사들과 교감하며, 꿈을 키운 학생들이었기에 일제의 무차별적 폭압 속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는 용기를 가졌으리라 느껴진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건물은 단단한 신앙심처럼 학교의 역사와 전통의 중심에서 미래를 키우게 하는 학생들의 성이 되었다. 우리 지역에도 찬찬히 돌아보면 우리가 모르는 지역 정신을 대변하는 흔적과 공간이 존재할 것이다. 수많은 세월 속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면면히 흐르는 전통과 문화가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묻혀 있다면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글쓴이: 김부열] 목포 근대역사문화 답사에서 본 것들 (2) 다음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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