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배(귀양살이)
향토사연구위원 甫農 이 규 엽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19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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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의 군주는 왕권을 유지하고 백성들의 안전한 생활보호를 위하여 법이 있어야 하고 위반자는 형벌을 한 다 고려 때 중국 명나라 대명율(大明律)을 도입하여 李朝로 이어져 시행하였다 이조 때는 전체의 형벌은 경중에 따라 태형(笞刑회초리) 장형(杖刑곤장) 도형(徒刑 구금 노역) 유배(流配) 사형(死刑)등의 다섯 가지가 기본 이다 현대는 생명형은 사형 자유형은 징역 금고 구류 재산형은 벌금 과료 몰수 명예형은 자격상실 자격정지 등 9가지로 변천 시행 하고 있다 유형(流刑)은 유배살이 귀양살이 또 유배(流配) 척찬(斥竄) 원배 (遠配)라 하고 큰 죄를 지은 죄인을 사형하지 않고 먼 변방이나 외딴섬 등 특정지역에 보내 기한이 없이 강제적으로 살게 하는 형벌로 죽음 다음가는 무거운 벌이고 왕족 또는 고관 정치인들에 사형을 면하는 것이다 관계 죄목은 역모 정치적 논쟁연루 사상적 갈등 부정부패 문란한 사생활 횡령 불효 종교 등이다 죄목의 경중에 따라 정배(定配)는 왕이 한 다 첫째 부처(付處)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지방수령의 처치에 맡겨 귀양 살게 하고 노비로 삼는 경우도 있어 가벼운 처벌이다 둘째 안치(安置)는 주거를 한정시켜 생활의 격리를 통해 고독과 외로움을 치르게 하는 형벌로 본향안치(本鄕安置)는 죄질이 가벼운 자에 고향에 유폐(幽閉)시키고 바닷길 멀이 절도안치(絶島安置)와 왕족과 중신 등 정치범은 가시울타리를 한 위리安置로 주민접촉 개인 활동이 엄격히 금지 된 현대 가택연금형태다 유배자의 호송은 정2품 이상은 금부도사 정3품 이하는 나장이 압송하고 신분에 따라 차등이 있고 호송관 없이 스스로 배소에 가는 것도 있다 고위관리의 유배길은 국가에서 말을 지급하고 유배 도중 경계 길목에 당해 수령들이 음식을 제공하고 예우도 했다 또 문중의 대표들이 돈과 물품도 선물하고 가난한 양반들은 경비를 자비로 스스로 부담하면서 걸어서 가고 음식도 부족하여 고통 서러운 길이며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다른 유배길이다 배소가 절해 고도인 제주도 추자도 등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익사도 하고 일본 중국으로 표류도 하였다 변방인 함경도 등 먼 길을 가는 도중 병으로 죽기도 하였다 배소(配所)의 유배인은 고을 수령이 관리하고 생활비를 고을부담 이 원칙이다 죄인을 수령이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정하여 위탁하고 보수주인은 지방유지로 거주할 집 한 채를 제공한곳이 配所 또 적소(謫所)라하고 감호책임을 진다 수령은 1개월에 1회식 점고 한다 재정이 어려운 고을은 수령과 주민들이 유배인 받기를 거절 하므로 정배도 균형을 맏추웠다 휘지(徽旨왕명)에 따라 처 첩 미혼 자녀는 함께 살게 하고 조부모 부모 기혼자녀도 상봉을 위하여 오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또는 가족이 따라와 살다가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세거하여 적은 종중도 있다 입향조의 세거유래도 한번 찾아 본 다 유배는 기한이 없는 종신형이 원칙 이나 언제 왕이 부를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기도 하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죽기도하고 따라서 가정의 몰락도 있다 또 정국의 변동으로 죄의 감형과 가중형과 다른 유배지로 이배되고 사면으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유배인 들의 생활은 기거(寄居)하는 집을 마련하는 것부터 먹을 양식 등 모든 것이 어렵고 구차하다 고을관아 수령이 죄인을 먹여 살릴 책임은 있으나 사정을 핑계로 책임해피가 일수다 죄인을 떠맡 을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정하는 것도 어렵고 보수주인이 정하여 저도 주인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할 경우 유배인은 자기 상실자로서 과거의 권위를 내세우며 양반의 거드름을 피우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여 직접 살아갈 방도를 찾아 장사 날품팔이 때로는 동양도 하는 일이 있다 어느 유배인은 보수주인의 저녁소식이 없으니 오늘 저녁식사는 굶어야 하는 구나 푸념도 했다 극소수는 본가의 지원 으로 호화롭게 살기도 하였으나 유배기간이 길어지면 지속 할 수 없어 결국은 삶이 쓸쓸하고 고달픈 것이고 대부분 사면을 바라보고 죄인으로 근신 한다 권세 없고 가난한 일반인은 극도의 괴로움의 삶이다 적소정배(謫所定配)는 죄의 경중에 따라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 충청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을 고루 지정 하였다 그르나 이조말엽 1800년 이후는 양천 과천 시흥 등과 왕족은 강화도가 많았다 농경사회의 농지가 넓은 전라도 경상도는 비교적 나은 곳이고 사화를 비롯한 정쟁에 연류 된 관료는 왕의 의지에 따라 환경이 척박한 추위와 식량부족 등 변방 함경도와 절해고도 제주도 거제 진도 완도 무인도 등 가족왕래가 불편하고 소식을 접하기 어려고 외롭고 고독한 곳이다 유배생활의 예로 패륜임금인 광해군은 대북파와 손잡고 왕권저해 세력을 처단하고 동복형인 임해군과 왕통의 적자 영창대군을 살해 하고 또 인목대비(선조왕후)를 유폐하므로 서인들이 반정을 이르켜 인조왕이 추대되고 왕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몰락한 광해군과 가족 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여 가족은 모두죽고 광해군만 1641년 제주도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유배생활 중 밥상이 외소하다 호통 하니 초병은 당신 때문에 나도 고생 한다 등 대북파와 왕권재기를 기다리다 61세에 쓸쓸이 생을 마감했다 김재남(선조의 장인)의 처(노씨)는 광해군의 외조모이자 인목대비 (선조왕비)의 어머니 노씨는 인목대비 유폐와 연류하여 광해군이 제주도로 유배하였다 노씨는 끼니해결 등 궁핍한 생활을 견딜 수 없어 그 곳에서 모주(母酒)를 빚어 판매하여 생활을 이어가는데 제주목사 양학은 점고하면서 사대부의 부인이 체통을 지켜라 하면서 심한 모욕과 박해를 하였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해배되고 제주목사 양학은 처형 되었으며 어머니가 술을 빚었다 하여 모주라 하였다 북헌 김춘택은 예학자 김장생의 후손으로 조부 金萬基는 숙종의 장인 부는 호조판서 金鎭龜이며 작은조부 金萬重에 문장을 배웠다 서인 노론가문의 중심인물로 벼슬은 하지 않았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 때 여러 번 투옥 유배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서인정권으로 풀려났으나 다시 소론의 탄핵을 받아 희빈장씨의 소생인 세자(경종) 를 모해하였다는 협의를 입어 1706년 제주도 유배될 때 아들 아우 조카 등 14명은 신지도 추자도 흑산도 거제도 등에 유배되었다 그 후 전국을 이배하면서 제주도에 2번가면서 아버지 김진구의 옛 적소에서 6년을 모두30년을 귀양살이하면서 김만중이 쓴 구운몽과 사시남정기를 한문으로 옮기고 속사미인곡 많은 시문 등 北軒集을 남기고 신원되고 증이조판서 시호 忠文이다 묵재 이문건은 16세기 이조좌랑으로 조광조의 제자로 을사사화에 연류 되여 고향성주에 2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값싼 토지를 많이 매입확장하고 매년 11-12월에 정기적 으로 5-6명의 노비를 김해에 보내 값싼 청어를 구입하여 처가인 괴산에 팔면서 많은 이익을 남기고 면포 명주 베를 팔아 환곡하는 등 이익을 남기고 노비가 100여명이며 목사 관찰사와 유대 했다 미암 유희춘 선조의 스승 전라도관찰사 이조참판역임 1547년 을사사화 양제벽서에 연류되여 제주도에 이어 함경도종성에 이배 되어 19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종성현감의 여종을 첩으로 딸 넷을 낳고 살면서 국경변방지역 민심을 교화하고 주민에 글을 가르치며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다산 정약용 조선 최고 실학자로서 서학을 배워서 한강 배다리 및 수원성 설계 등 정조왕이 아끼는 신하이나 다른 관료가 시기하였다 정조가 승하하자 종교적으로 신유박해에 연류 되어 전남 강진에서 19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학문을 집대성하여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경세치용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명신 청백리 고불 황희는 남원 명장 절재(節齊) 김종서도 국경 지역 함경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세종대왕은 아끼는 신하를 유배를 통해 관료들을 성숙시키고 다양한 시야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 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환관 김순손은 연산군의 타락을 아뢰다가 노여움을 쌓아 제주에 유배 되여 중노동과 사형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배고픔과 과로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면암 최익현은 1872 대원군 경복궁사업 중지와 서원철폐령 부당 상소로 제주도 유배 위리안치되고 1905 을사보호조약 무효와 박재순 이완용 이근택 이치용 권중현 오적(五賊)처단을 주장하고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여 사망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올곧음에 비교하여 다른 정책에 대해서는 비분이 일어서거나 상소 장계를 올리던 것을 의무로 알았으니 정치적 추방형이었던 유배는 끝없는 사화 당쟁 의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으로 추방되고 격리되는 고난을 격는 것은 15-16세기에 통계에 관료의 23,4%가 유배경험이 있고 당파 싸움이 혼탁한 17세기 이후는 비율이 더 높았으며 관직에 나아간 사람치고 거의 유배경험을 하며 살았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 수양으로 학문적 사상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어 학문적 성과를 이루 웠고 후진양성 시 가사문학 소설문학 경세치용 저서 등 긍정의 역할도 있었다 |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19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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