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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창녕신문 |
| 5세기 후반 후기 가야연맹체가 가장 번성하였을 때 그 영역은 거창과 함양을 거쳐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섬진강 유역까지 영향력이 미쳤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 삼아 신라와 대립하였다. 삼국사기와 양직공도 그리고 일본서기 등에서 확인되는 후기 가야의 소국으로는 대가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손국, 임례국, 남가라국(금관국), 탁순국, 탁기탄국, 거열국, 사물국, 대사,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등 후기 가야 연맹은 전성기에 영남 지역의 16개국과 호남 지역의 6개국을 합하여 모두 22개 소국을 아우르고 있었고 있었다. 이 철기로 무장한 가야의 기마무사상 소국들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강력한 철기병으로 무장한 군사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가야 유적지에서 백제나 신라 고분에 비해 수많은 철제 무기나 갑주, 마구류 등 군사력을 상징하는 무구류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찌하여 백제에도 밀리고 신라에 의해 일찍 멸망하게 되었을까? 직접적 멸망의 원인은 562년에 대가야가 신라의 이사부가 이끄는 2만 대군을 당해내지 못한 데 있지만 정작 대가야가 신라군을 막지 못한 것은 단기간의 실정 때문만은 아니다. 가야는 총체적으로는 약하지 않았는지만 신라에 쉽게 허물어지게 된 것은 입지적 원인에 있는 것은 보여진다. 가야지역 고분군들은 거의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 고분군들은 대개 5~6세기의 것들이다. 토기와 철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기 때문에 가야의 국력이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야연맹체 소국들은 농업과 해운 등 입지 조건들이 거의 대등한 상태여서 소국들은 독자적이고 고른 문화를 축적하고 있었다. 초기 김해 금관가야가 우월했다고 하나 다른 소국들을 통일하면서 영토 확장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김해, 부산, 창원, 함안, 고령의 가야 소국은 문화, 경제적 입지가 뛰어나 그중 하나가 결정적으로 우월해지기가 어렵고 또한 세력균형을 이루어 서로 견제가 되었다. 특히 이 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 경상도 내륙으로 진입하는 수상 교통이 발달하여 선진 문물 창구인 한반도 서북부 및 중부까지 해운 교통조건이 좋고 남으로는 왜와 교역하고 있어서 외부 세력들 의해서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4세기 말 5세기 초 낙동강 유역을 둘러싼 패권에서 가야는 신라에 패배하여 낙동강 유역을 내주었고 특히 신라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대를 끌어들여 금관가야를 공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야연맹체 맹주인 금관가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으로 가야 맹주국이 주변 소국들을 영도해 나가는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지 못했고 5세기 중엽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가 형성되어 초반에는 연합체의 외교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세력을 키우기도 하였지만 이미 백제와 신라에 비해 떨어진 국력을 만회하기는 어려웠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강력한 왕권으로 더욱 강성해진 백제와 신라로부터 여러 번의 도전을 받지만 가야는 이들 세력에 대해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일사불란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또한 이들 연합체는 의사결정이 늦고 비능률적이어서 힘을 한데 모으기 어려웠다.
그러나 가야의 힘은 철 생산 능력 면에서는 확실한 우위에 있었다. 가야는 일찍부터 풍부한 철 생산력을 기반으로 활발한 교역으로 낙랑이나 백제의 선진 문물을 구해올 수 있었고, 초기에 왜에 대하여서도 철기 교역을 통해 한동안 그 들을 영향력 아래 둘 수 있었다. 왜국은 3∼5세기까지 대부분의 철재를 가야에서 가져다 쓰다가 5세기 말에는 자체 개발하게 되는데 그 결과 가야는 6세기 이후부터는 철기류를 통한 왜에 대한 지배력은 상실했다. 게다가 왜는 문물 면에서 가야보다 우월한 백제와 직접 교역하게 되면서 가야의 입지는 더욱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요인들이 겹치면서 가야는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야연맹체는 수평적 연대로 소국 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백제와 신라에 비해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지 못한 점, 그로 인해 외교적, 군사적 도전에 대한 의사결정이 늦었던 점 등이 가장 큰 쇠퇴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고대국가에서는 단일국가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 체체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에 의해 한 국가의 흥망성쇄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