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의 여전사들
남 중 희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21년 11월 16일
여전사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다. 아마존의 여전사에 대해서는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유적에서 발굴된 항아리에 아마존의 여전사가 그려져 있다. 그리스의 영웅이 아마존의 여전사와 싸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인은 아마존의 여전사들이 실제로 그들을 위협할 정도로 전투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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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창녕신문 |
| 러시아 남부에 발견된 아마존 여전사의 유적은 신화를 역사로 증명한 무덤이다. 무덤 한가운데 안치된 인골은 아마존의 여전사였고 인골 주변에 매장된 유물 중에는 화살촉도 있고 함께 발굴된 청동칼들이 여전사의 손에 꼭 맞게 제작된 무기로 판명됐다. 한편 여전사 아래쪽에 있는 인골은 상당히 불편하게 구부린 자세였는데 이는 여전사를 모셨던 남자 시종으로 추정된다. 아마존 여전사라고 하면 남미의 아마존강을 연상하는데 아마존 여전사가 실제로 발굴된 곳은 카자흐스탄 국경의 유라시아 초원지대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마존 왕국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존 여전사 외 여전사의 실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한반도의 금관가야에도 여전사들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전사 사례1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갑옷과 철제투구로 무장한 채 순장된 세구의 인골들이 나란히 한 무덤에서 발견되어 분석결과 이들은 모두 20~30대의 여성으로 밝혀졌다. 정밀 분석결과 이들의 다리근육이 보통여성보다 훨씬 발달해 있음이 확연히 드러나 여성 전사였음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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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사 사례2 김해 예안리 57호분에서 또 다른 여전사의 흔적이 발견됐다. 기마병의 말갖춤새는 물론, 22점의 철촉과 철창 등 주로 남성 전사의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대거 나온 것이다. 출토된 환도는 이 여전사가 지휘관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5세기 이전까지는 가야에 여전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여성들이 전사로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4세기는 동아시아의 일대 격변기였다. 그동안 북방에 주력하던 고구려가 한반도로 눈을 돌리면서 백제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금관가야와 신라 간의 전쟁이 이어졌다.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신라와 합세하여 가야를 압박하고, 금관가야와 백제, 왜가 연합하여 대항하는 한반도 남부지역은 격전지가 되었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작은 나라인 금관가야의 국력으로는 전사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여전사라는 집단을 양성하게 된 것이 아닐까?.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금관가야의 유물들이 대거 쏟아져나왔는데 금관가야의 4세기의 유물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들이 감지된다. 투구와 철갑옷 같은 방어용 무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화살과 창 같은 공격용 무기는 살상력을 한창 증가시키는 형태로 바뀌었다.
즉 3세기의 창은 적을 찌르는 단면이 타원형이지만 4세기 창은 폭이 좁고 날카로운 다이아몬드형이다. 화살촉도 마찬가지다. 3세기까지는 목이 없는 단촉에다 타원형이였지만 4세기에는 철촉을 끼우는 목이 생기고 단면은 날카로운 삼각형이다.
4세기경 중국에서도 5호16국의 시대로 혼란이 시작됐고 그 틈을 타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을 함락시키고 한반도 남쪽으로 눈을 돌렸고 당연히 백제와 고구려간에는 전선이 형성됐다. 한반도 동남부의 패권을 놓고 가야와 신라가 접전을 벌이는 형국이 되었다.
마침내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5만대군과 맞선 금관가야는 백제와 왜 연합군으로 대항했지만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군사력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종발성에서 항복하는 등 금관가야의 멸망을 앞둔 시점에서 출산경험이 있고, 다리 종아리 부근 가자미 근선이 발달로 보아 특별히 훈련된 여전사들인 금관가야의 20대 여자 두명, 30대 여자 1명, 세 명의 여전사는 주군을 따라 순장되었고, 예안리 고분에는 말 갖춤새와 창, 화살촉과 검의 형태로 보아 지휘관으로 보이는 여전사가 고분의 주인으로 판명되었다. 그녀들은 기울어져 금관가야를 지키고자 기꺼이 창검을 들었을 것이고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가야의 여인들이 의연하고 용맹함이 느껴진다. |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21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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