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중 희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발견되던 별자리가 한반도 남쪽 가야의 왕 무덤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총 134개의 성혈로 이루어진 이 별자리는 실제로 함안의 여름 밤하늘에 보이는 궁수자리 · 전갈자리 즉 남두육성 · 기수 · 미수 · 심수의 모습을 그대로 새겨 놓았다. 왕이 생전에 보던 별을 무덤 천정 돌에 새긴 것이다. 고대국가에 필수적이고 최고의 학문이던 천문학이 아라가야 왕릉에서 발견된 의미는 무엇일까?
말이산(末伊山)은 ‘머리산’의 소리음을 한자를 빌어 표기한 것으로, ‘우두머리의 산’ 즉 ‘왕의 무덤 산’이라는 의미다. 고분군의 이름과 매장시설의 규모와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아라가야 왕의 무덤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이산 고분군은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조성된 아라가야의 고분군으로, 가야시대의 단일 고분으로 최대급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말이산의 북쪽에서 남쪽, 주 능선에서 가지 능선 순으로 조영된 고분은 말이산 전체를 아우르며 분포하고 있다. 해발 40~70m의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북으로 1.9㎞ 정도 길게 뻗은 주 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여덟 갈래의 가지 능선으로 구성돼 있다. 아라가야 권역에 조영된 고분군은 대부분 독립된 구릉보다는 배후 산지에서 뻗어 내린 능선을 중심으로 조성되지만, 분지의 중앙으로 뻗어 내린 독립된 구릉에 자리 잡은 고분군은 말이산 고분군이 유일하다. 이는 지형과 경관을 고려하여 주변의 넓은 들을 내려다볼 수 있고, 주변에서 우러러 볼 수 있는 곳에 왕의 무덤을 배치하여 권력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아라가야 지배계급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말이산 고분군에서는 현재까지 1만여 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됐다. 불꽃무늬가 새겨진 다양한 토기들과 투구 · 갑옷 등의 무기류, 말 갑옷, 금동관 등 출토된 유물과 매장시설의 구조는 당시의 생활상과 풍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말이산 구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13호분에서는 사수자리, 전갈자리 등 초여름 밤하늘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발견됐다. 가야 무덤에서 별자리가 확인된 것은 최초의 사례로, 중국-고구려-가야로 이어지는 고대 동아시아 천문사상의 교류 가능성을 보여준다. 봉분을 가진 덧널무덤인 45호분은 대형 봉토분의 출현과 나무 덧널에서 돌 덧널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분이다. 여기에서 봉황 장식 금동관을 비롯해 사슴 모양 토기, 집 모양 토기, 배 모양 토기 등 다양한 토기가 출토됐다. 두 마리의 봉황이 마주 보고 있는 세움 장식의 금동관은 두 마리의 봉황이 대칭을 이루어 출(出)자나 사슴뿔 모양인 신라, 풀, 꽃 형태인 대가야 금동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통치자의 위상을 상징하는 금동관의 존재를 통해 아라가야의 강력한 왕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45호분에서 발굴된 봉황 장식 금동관 말이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은 아라가야 문화의 정수로, 찬란했던 문화를 보여줌과 동시에 고대 한반도의 일원으로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라가야 시대 봉토분은 총 37기로 가장 북쪽에 있는 1호분부터 남쪽으로 진행하면서 주 능선-가지 능선 순으로 일련번호가 붙여져 있으며 가장 남쪽에 있는 고분이 37호분이다. 주변에 봉토가 평평하게 되어 고분원형을 잃어버린 것이 적지 않지만 1000여기 이상의 가야 시대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이산 고분을 조영한 아라가야는 가야 6국 중 하나이지만 가야의 전기와 후기에 이르는 서기 42년부터 561년까지 약 519년 동안 지속된 긴 역사를 가진 아라가야는 가야의 맏형격으로 대가야가 신라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자 아라가야는 529년 안라고당 회의를 개최하여 자립을 모색해 보지만 백제와 신라가 호응하지 않아 531년 백제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554년 백제와 화친을 도모했고 백제 요청으로 관산성 전투에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대를 파병했다. 이 전투에 아라가야의 국운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 가야 연합군은 신라에 패배했고, 남아있던 가야제국들이 차례로 신라에 합병되었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가 아라가야의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