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철기문화와 가야의 철제 유물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22년 05월 17일
남중희
터키가 위치한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500년 동안 제국을 건설하며 꽃을 피웠던 히타이트(Hittite)는 19세기까지 약 3천 년간 그 존재를 몰랐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700년부터 기원전 1200년까지 존재한 고대국가로 인류 역사에 철기 문화를 최초로 전해준 국가이다. 발굴을 통해 해독된 히타이트어가 새겨진 대량의 점토판들에 의하면 히타이트는 법 제도, 언어와 역사, 문화, 예술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275년 철제 무기를 앞세워 시리아를 정복하려는 이집트 람세스 2세 군대를 막아 전투를 벌일 정도로 강대국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자는 람세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무승부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이집트 군대가 철수하자 히타이트 군대는 이집트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였고, 전쟁의 원인 제공자였던 아무르 왕국이 히타이트로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히타이트의 철제기술은 이집트로 전파됐으며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세계 최초의 평화협정을 맺어 이집트와 대등한 세력임을 보여주었다. 이 평화협정문이 새겨진 점토판은 지금도 전하고 있으며, 중동에서의 첫 평화조약이라는 의미로 그 복제품이 UN본부에 전시돼 있다. 아쉽게도, 히타이트 유적지에는 철기 유물은 청동기에 비해 미미한 수준으로 출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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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인들 철제무기
히타이트인들이 최초로 철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철기를 마구 찍어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철을 녹이려면 용광로 온도를 올리기 위해 공기를 공급할 풀무가 필요하지만, 당시 히타이트에는 풀무가 없었다. 히타이트인들은 풀무 대신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 아나톨리아 평원의 한 지역에서 특정 시기마다 맹렬히 불어오는 황야의 바람으로 풀무를 대신했다. 이들이 만드는 철기는 생산시기와 장소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하는 한정된 상황에서만 생산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다 보니 생산량이 아주 적고 공급도 일정치 않았다. 그러나 1,000도 이하에서 제작되는 청동기보다 500도를 더 끌어올리는 제철기술은 혁신 그 자체였다. 히타이트에는 숭배하는 신(神)이 너무 많아 천의 신(神)을 가진 나라로 불리며, 그 중 철기를 만들어주는 바람의 신을 비의 신과 함께 최고로 숭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히타이트인들은 자연풍을 통해 만든 철기를 초자연적인 신성한 재료로 만든 축복 그 자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철의 값어치는 금의 5배, 은의 40배에 해당한다고 하니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인식할 만하다. 우리나라 철기시대가 BC 4~5세기가 되어서야 유입된 것을 감안한다면, 히타이트의 철기문명은 인류의 삶과 문화, 역사를 바꾼 ‘혁명’으로 인식되는 점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가야를 떠올린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가야에 대한 서술은 어느 정도 있지만 삼국이라는 제목에서 말하는 삼국에는 가야속 하지 않는 잊혀진 왕국이지만 가야도 400년이 넘는 세월을 한반도에서 버텨왔다. 이는 조선의 통치기간과 맞먹는 긴 역사이다. 중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가야는 철을 많이 생산해 낙랑과 왜에 수출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가야유적에서는 철제 갑옷류와 말갑옷 등 철기병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어 강력한 철의 왕국임을 증명하고 있다. 철기문화의 정수인 가야의 갑옷은 투구 뒤에 폈다 접을 수 있는 목가리개를 장치했고 정강이를 덮는 경갑도 있고 착용후 어깨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제작되어 서구의 갑옷보다 활동적이고 제작연대도 앞선 것으로 알려졌 있다. 91년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발굴된 철기유물들은 4세기 중엽에는 기마용 갑옷과 마구 등 철기로 무장한 기마군단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옻칠한 가죽화살통은 일본고분에서 출토된 4~5세기 때의 같은 형태의 화살통보다 1세기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 가야에서 일본으로 무기문화가 건너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출토된 철제 유물들이 가야에서 출토된 철제 유물과 같은 성분이 드러났고 김해에서 발굴된 직경12cm에 달하는 파형동기는 일본 것(직경7cm) 보다 더 크고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기마 관련 출토품과 함께 가야가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고대국가 였음이 증명하고 있다. 당시 중앙집권제도 성립하지도 않았던 왜(일본)가 임나일본부를 한반도에 운영했다는 주장은 얼른 보아도 허구임을 확신할 수 있다.
특히 가야 수출품 가운데 덩이쇠가 있는데 이는 마치 제철소에서 만든 질 좋은 두꺼운 철판 같은 것으로 3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부산과 김해 등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덩이쇠는 교역품으로 큰 가치를 지녔으며 화폐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구, 무기, 마구, 농기구, 그리고 제례용품 등 다방면의 철제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어 가야는 비록 히타이트(Hittite)에 비해 철기 문명이 늦게 시작되었지만 철기문화의 그 우수성은 최근 가야유적의 지속적 발굴로 찬란한 철기 문화의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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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22년 0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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