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문화원장 한삼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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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녕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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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드라마에서 본 장면 하나가 불현듯 떠오른다.
며느리가 김치찌개를 끓였다. 어제 유튜브를 보고 소금 5g, 국간장 한 스푼. 간을 정확히 맞췄다. 자신 있었다. 시어머니가 한 술 뜨더니 말했다. "에구, 싱겁다." 그 한마디에 며느리의 자존심에 불이 붙었다. "어머니, 싱겁지 않아요. 레시피대로 딱 맞췄어요." 두 사람은 식탁에서 10분 동안 찌개 간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며느리는 계량스푼을 가져왔고, 시어머니는 혀가 증거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찌개는 식었고, 밥상은 얼어붙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며느리를 부엌으로 불러 말했다. "이 바보야. '어머니, 싱겁네요. 소금 좀 더 넣을까요?' 이 한마디면 될 것을, 왜 점수를 매기니. 네가 맞으면 뭐하니. 밥상이 깨지는데."
우리는 이 같은 일상을 매일 겪으며 살아간다. 회사에서 동료가 "글씨가 좀 작지 않나요?"라고 하면 "11포인트가 표준입니다"라며 규정부터 꺼낸다. 친구가 "요즘 연락이 너무 뜸하다"고 하면 "내가 얼마나 바쁜데"라며 스케줄 표를 펼친다. 우리는 모두 간은 맞추는데, 밥상을 깨는 데는 천재다. 진실이 밥상보다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면 상대가 "아, 내가 틀렸네" 하고 수긍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가족은 더욱 그렇다. 가족에게 필요한 건 정확한 레시피가 아니라 "당신 입맛을 존중한다"는 신호다.
시어머니의 "싱겁다"는 말은 미각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나는 좀 짜게 먹는데", 혹은 "내 말을 좀 들어주면 좋겠다"는 생활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포용은 지는 게 아니다. 통역하는 것이다.
"싱겁다"를 "틀렸다"로 듣지 않고 "짜게 드시는구나"로 듣는 것. "연락이 뜸하다"를 "네가 잘못했다"로 듣지 않고 "보고 싶다"로 듣는 것. 그 통역 한 번이 소금 한 꼬집보다 가정의 간을 맞춘다.
물론 죽고 사는 문제에서는 간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 건강, 안전, 원칙의 문제에서는 양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루 싸움의 90%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김치찌개 간 같은 문제다. 오늘 짜면 내일 싱겁게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김치찌개 간 문제에 인생을 건다. 이겨서 얻는 것은 "내가 맞았다"는 3초의 쾌감이고, 잃는 것은 같이 밥 먹는 저녁 한 끼의 온기다.
오늘 식탁에서 누군가 "싱겁다"고 하면 이렇게 말해보자. “아, 그렇네요. 소금 좀 더 넣어 드릴게요”. 당신이 틀려서가 아니다. 당신이 맞기 때문에, 그 맞음을 잠시 포켓에 넣어 두는 여유. 그게 어른의 간이다. 간의 정답보다 밥상의 평화가 먼저다. 간은 다음에 맞추면 된다. 밥상이 깨지면, 그날 저녁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난득호도(難得糊塗)’라고 했다. 때로는 모르는 척, 어리석은 척 하는 것이 지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