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현답:우리들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창녕의 반면교사를 위해
한정우칼럼(창녕행정발전위원회 위원장. 법무사)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17년 10월 19일
우문현답:우리들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창녕의 반면교사를 위해
한정우칼럼(창녕행정발전위원회 위원장. 법무사)
지난 추석 연휴동안 필자는 가족들과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다. 황동혁 감독의 연출법은 설득력이 있었고,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몰입을 도왔으며, 영화 곳곳에 원작의 작가 김훈의 힘 있는 문장이 느껴졌다. 인조가 궁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참담했고, 바깥의 적을 두고도 조정에 끊임없는 내분이 일어날 때는 분노가 일었으며, 인조가 삼궤구고두례를 할 때에는 가슴이 아팠다. 본디 이처럼 각색된 영화란 고증과 픽션이 섞여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영화의 많은 부분에는 현실 정치와 한국사회의 본질과 궤를 함께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영화를 보며 느꼈던 점들을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창 끝은 내부가 아니라 바깥의 적에 향해야 했다
필자의 답답함은 조정과 고관대작의 권위와 권력이 동요된 백성을 무력진압하는데 작동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중신과 왕족의 예복과 재산은 체통과 예식을 내세워 보호하면서, 병사가 추위를 가리던 가마니와 백성의 초가집 지붕을 뜯어 말먹이를 위해 볏짚을 몰수했다. 겁먹어 진군하지 않는 병사를 등 뒤에서 무참히 베었고, 대신들은 본인의 입지를 위해 무고한 누명을 씌워 부하장수를 참수했다. 공동체가 위기일수록 많이 가진 이들이 더 많이 부담하고, 본인을 믿고 따르는 부하장수를 보호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일 것이다. 극화된 연출이 있었고 실제 고증에서는 그렇게 까지는 않았다고 하나, 국가권력이 사회적 상식, 인간적 도리와 정반대로 작동될 때 많은 이들이 불행해진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발전적이지 못한 조정 중신들간의 정쟁과 설전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안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 백성과 군사가 굶주리고 있는데도 척화를 주장하며 성에 남아야한다고 하는 이들은 명이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우리 조정에는 청이 중국 중원을 압도하고 있던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는 외교 군사분야의 전문가가 단 한명도 없는 것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말 할 수 없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봄이 맞을 것이다. 다수의 세를 이루고 있던 이들은 본인과 다른 주장을 하는 이를 역적이라 칭했고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국가와 공동체를 향한 충심이 다를 수 있을까? 성 밖의 적이 두려워 망루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이들이, 성 안의 동료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없는 그 단호함이 무서웠다.
공무를 수행하는 직책은 개인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성에서 끝까지 남아 죽음으로 명에의 충심을 지켜야 한다는 척화 대신의 주장은 결국 같이죽자는 이야기였다. 현재의 시대윤리로 당시의 관념을 평가할 수 없으나, 영화관을 나와 가족들과 의견을 나누어도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결국 본인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시는 임금과 각료대신들, 남한산성에 거주하던 민초들과 임금을 따라 성에 들어온 백성들에게도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직 살기위해서 임금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본인의 이상향과 이념을 강제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국가나 지방정부 단위 공동체의 의사결정은 강압적이며 생사여탈마저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의 권력은 더욱 신중해야하고 엄중해야한다.
적어도 백성과 국가의 안위를 고려한다면, 백성이 있어야 임금이 있고, 임금과 사직을 보존해야 국가도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주화파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고 할 것이다. 관료의 올바른 몸과 마음가짐에 대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술한 목민심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관리는 덕행, 신망, 위신이 있어야 하고, 청렴과 절검을 생활신조로 삼고, 명예와 부를 탐내지 않으며 뇌물을 받으면 안 되며, 백성에 대한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국가의 정령을 두루 알리고 민의를 상부에 잘 전달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애휼 정치에 힘써야 한다.’ 지금도 한 구절 틀림없이 지극히 지당한 명언이다. 그 어디에도 개인적 신념과 만족감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부분은 없다. 위민(爲民)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관통하는 관료의 마음가짐의 근간이며 근본 덕목인 것이다.
지도자는 오롯이 책임지는 결정권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시 중신과 임금은 분별력 있고 진취적으로 사고해야 했다. 국가와 조정의 지도자였기에 더욱 그렇다. 혹자는 대명의리론의 척화론은 부당했다는 필자의 말이, 지나간 일이었기 때문에 결과론적인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일어나는 현실 앞에서 번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산성 안의 백성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갈 때, 적은 병사가 압도적인 수 차이로 청군에게 살육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말이다. 결국 삼전도의 정축하성(丁丑下城)이후에도 50만명의 조선의 백성들이 청으로 끌려가 혹독한 수모를 받아야만 했다. 백성의 고난에도 예민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이 어쩌면 왕조시대의 권위주의 때문에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며, 사농공상의 관념과 반상의 법도가 지배한 나머지 하층 계급의 희생이 당연시 되던 시대정신 탓이 컸을 것이리라.
제헌헌법 이후 민주주의가 제도화 된지 70년을 채워간다. 시민주권시대에서 시민의 희생이 왕조시대나 봉건사회에서처럼 당연시될 순 없다. 한국전쟁 당시 참전을 결정했던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말을 한 바 있다. 민주주의의 공직자가 가져야할 책임감과 마음가짐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이라 생각한다. 영화 곳곳에서 연출된 고관대작들, 누리기만 하고 책임은 아랫사람에게 넘겨 목숨을 빼앗은 모습 앞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말은 경종을 울린다.
오늘날 우리의 창녕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지금 대한민국은 조선업을 비롯한 제조업 분야의 쇠퇴, 청년 일자리 고용의 감축, 그리고 저성장국면에 처해있다. 지방분권시대 이후로 제도화된 지방정부간의 경쟁의 틈 속에서 창녕도 고도화된 경쟁에 처해있다. 더 많은 관광객이 찾고 주민이 전입해오도록 우리 공간을 가꿔야하고, 농업인들의 소득증대와 더 많은 기업을 유치하며, 정부예산을 끌어오도록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농업용수로 써야할 창녕함안보의 물이 우리 지역 농민의 의지와는 다르게 방류되고, 낙동강 창녕워터플렉스 사업이 중단되었으며, 부곡하와이의 폐업이후 부곡온천관광특구는 어려움에 처해있다. 현실은 난항이고 이상과 같지 않으며 외부지원은 쉽지 않다. 현시점에서 창녕은 국가로부터의 재정지원을 받아오는 노력과 동시에 스스로의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과 집중을 하여야 우리의 미래 창녕이 영광과 자랑스러움으로 기억될 것이며 희망의 내일로 나아갈 것인지 준엄한 질문 앞에 가슴이 무거워진다.
분별력과 통찰력 있는, 그리고 비전을 제시하고 책임지는 우리의 지도자
이런 상황에서 다른 선진지방정부는 지식위주의 고부가가치산업으로 대응하고 있다. 지방정부와 도시는 지역 고유의 문화와 산업을 근간으로 주민에게는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지역의 자원으로 안정된 지역경제를 구축하고 새로운 산업에 대응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창녕도 문화적 공간을 조성하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창조적 인재가 모이면 그들의 인적 네트워크로 창녕만의 컨텐츠가 채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창녕은 선진과 창생의 공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지금 창녕에는 이러한 일들을 위한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
남한산성의 교훈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더 나은 창녕으로 발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창녕 선진화의 핵심은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지역을 만드는 데 있다. 많은 군민들께서 공감하고 동행하는, 혹은 외지의 시민에게도 안식을 줄 수 있는 도시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주민들 내면에 있는 주관적인 바람과 선호에 대응하는 우리의 터전으로 창녕을 만들고 발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들, 부곡온천과 낙동강 창녕워터플렉스사업, 우리 지역 농산물의 고부가가치화, 노인과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와 복지,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와 선진화의 과제에 우리는 창조적으로 해결해나갈 자원과 저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역사는 역사 그대로 남아있지 않고 현실의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가져다 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역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슬픔과 아쉬움의 역사를 다룬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나는 우리 창녕을 떠올렸고 이러한 바를 느꼈다. |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17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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