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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尹奉吉:1908-1932) 義士는 100년 전 농민독본(農民讀本)에서 ‘자국민의 먹거리를 자급 생산하지 못하면 우리의 주식은 외국인 손에 넘어 간다.’고 예언하며 생명창고(生命倉庫)를 지키자고 강조하였다. 필자는 1960년대 국민(초등)학교 시절 미국의 원조곡물인 옥수수 빵과 죽을 학교 급식소에서 배식 받아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현재 세계 230여국 80억명의 인구 중 8억명이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49.3%)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2023년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의하면 곡물자급률이 캐나다 180%, 미국 120%, 중국 91%, 일본 27.3%. 한국 19.3%이다. (고구마·감자 105%, 쌀 98%, 보리 38.2%, 옥수수 3.6%, 밀 1.3%이고, 육류(쇠고기, 돼지고기) 50%, 목재 자급율도 15% 수준이다.) 농업은 생명산업이자 생명창고이고 농민은 식량 생산의 주역인 애국자이다. 三農(農業, 農村, 農民)이 부흥하지 못하고 소멸하면 곧 국가 상실로 연결된다. 5-60년대 草根木皮와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현재 쌀의 소비가 감소하여 저장 창고가 넘치지만 식량 안보는 매우 중요하다. 선진국은 식량자급률 50% 이상을 법제화하는 농업기본법, 식량안보 보장법 등으로 식량 무기화에 대비한 식량안보를 강화하고 있다. 대한민국 농업의 아버지인 우장춘(禹長春:1898.4.8.∼1959.8.10.)박사는 일본 도쿄에서 출생한 농생물과학자, 식물학자, 원예육종학자이다. 1945년 8.15 광복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아버지(우범선)가 훈련대대장을 역임하던 중 일본인 자객들과 함께 공모하여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되어 살해당하고 일본인 어머니가 장남인 우장춘 형제를 보육원을 거쳐 사찰에서 지내다가 어머니 품에서 아버지의 죄책감을 안고 성장하며 언젠가 한국에서 속죄하며 헌신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1916년 4월 동경제국대학 농학과에 입학하여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1936년 5월 4일 모교에서 ‘종(種)의 합성’ 이라는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창설한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박사에게 연구소의 운영을 부탁했고, 그는 1950년 3월 8일 대한민국에 귀국했다. 우장춘은 처·자식을 일본에 남겨두고 모친상을 당했으나 출국하지 못하고 원예시험장의 강당에서 어머니의 위령제를 지냈으며, 그 당시에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조의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원예시험장에 물이 부족했던 탓에 '자유천'이라는 우물을 파서 농업 연구에 활용하였다.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벼의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을 연구하였으며, 1935년 ‘배추 속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 이란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하였고, 씨 없는 수박을 국내에 첫 도입하였다. 우장춘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농림부장관 임명도 사양하고 벼와 감자, 배추, 무, 감귤 등 종자개량 연구에 몰입하였다. 1958년 농림부 농사원 원예시험장 대표 수장이 되고, 사망 직전인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의 연구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견학코스가 되었고 연구소에서는 늘 고무신 차림이었기에 '고무신 박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국에 온 지 9년이 되던 우장춘 박사는 너무나 고된 연구 과제를 밤낮 보낸 탓에 1959년 8월 10일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수원 농촌진흥청 내에 있으며, 2003년 4월 21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獻額)되어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장춘 박사의 헌신으로 우리나라의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이 되었고, 국민들은 굶주림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던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사이먼 쿠츠네츠는 ‘ 농업의 발전 없이는 산진국이 될 수 없다.’ 고 했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 낮은 식량자급률과 농가소득 향상 등 극복해야 할 농업정책의 대안이 시급한 현실이다. (윤수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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