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산(九龍山)에 오르며
김영일 (부산시청미디어센터장)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20년 0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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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초에는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평정심을 갖기 위해서 일 것이다. 알프스나 히말라야 설산으로 원정을 떠나거나 대청봉을 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고향의 명산인 구룡산을 찾았다. 그리 높지 않아 쉽게 오를 것으로 믿고 약간의 간식과 물을 챙겨 길을 나섰다. 부산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반가량 달려 도착한 곳은 관룡사 주차장이다.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진영에서 국도를 따라 수산을 거쳐 옥천으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 나는 평소에도 호젓한 시골길을 드라이브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 겨울인데도 초록을 유지하는 농작물과 겨울 산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빛바랜 잎사귀들이 수줍은 듯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한가로운 검둥이가 길을 넘나든다. 부곡을 지날 때는 하얀 수증기가 대지를 덮어 여기가 온천지역임을 알려준다. 계성천을 따라 굽이굽이 오르다 보니 어느새 관룡사 입구에 다다랐다. 절 마당에서 일행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출발했다. 해발고도가 700m에 불과해 뒷동산에 오르는 기분으로 가볍게 시작했는데 착각이었다. 좁은 등산로는 나무뿌리가 뒤엉켜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숲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병풍 같은 바위가 수시로 길을 막아 엉금엉금 기어오르기도 했다. 뒤따르던 L이 갑자기 S.O.S.를 쳤다. 마침 침술을 전공한 P의 응급처치 덕분에 식은땀을 흘리던 L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쉬엄쉬엄 오르자며 약속하고 보폭을 천천히 옮겼다. 임진왜란과 6.25를 겪으며 수세기를 버텨 온 노송(老松) 아래서 밀감과 달콤한 초콜릿으로 체력을 보강한 뒤, 깔딱 고개를 넘어 정상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재촉했다. 구봉(九峰)이 금강산 만물상에 도전이라도 하듯, 제마다의 맵시를 뽐내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햇살을 받아 발광하는 기암괴석은 곰이 달려오는 형상을 한 것도 있고 아기를 업은 아낙의 모습도 보였다. 땀이 식기 전에 출발하자고 C형이 재촉했다. 근육이 풀리면 하산 길에 고생한다는 것이다. 청룡암(靑龍庵)은 길을 잘 못 들어 멀리서나마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화왕산으로 향하는 삼거리에서 잠시 망설이다 서둘러 하산 길에 들었다. 정상에서 보았던 장엄한 불상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좌여래불(石坐如來佛) 용선대(龍船臺)이다. 천년세월을 온갖 풍상 다 겪고 나라를 지켜준 호국불(護國佛)이다. 불상이 동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필시 신라시대에도 왜국(倭國)은 성가신 존재였나 보다. 불편한 몸으로 길을 나선 S형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산행에 큰 무리가 없었다. 편조대사(遍照大師) 신돈을 흠숭하며 그에 대한 역사왜곡을 개탄하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신씨 후손이다. “부처님,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겨레의 안녕을 위해 빕니다. 영원무궁토록 길이 보살펴 주십시오.”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길 바라며 관룡사 후원으로 향했다. 잠시 뒤돌아 구룡산을 올려 보았다. 아홉 개의 봉우리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는가? 누가 작명했는지, 이름 잘 지었다고 했더니, 신문기자를 지낸 C형이 “지금은 관룡사 때문인지, 관룡산으로 부르고 있다”며 옛 지명을 되찾아 줘야한다고 역설했다. [설악산 신흥사], [속리산 법주사], [토함산 불국사], [금정산 범어사], [영취산 통도사] 등 어느 곳 하나 산과 대표 사찰이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곳은 없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유야 어떻든 누군가가 구룡을 부담스럽게 여겨 개명했구나(?) 일제강점기 때는 우리고유의 지명을 일본식 한자어로 바꾸는 작업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그때 저지른 오류를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 줄 것을 행정 당국에 건의한다. 관룡사(觀龍寺)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고찰이다. 지금은 통도사의 말사로 속해 있지만 대웅전과 약산전이 보물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보호하는 중요사찰이 되었다. 그리고 관룡사는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소문 덕분인지, 연중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대웅전 동쪽 샘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마시기 위해 등산객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물 한잔 마시고 해지기 전에 서둘러 옥천사지(玉泉寺址)로 향했다. 옥천사는 고려 말에는 명성이 높은 대가람(大伽藍)이었다. 공민왕의 왕사(王師)인 신돈(辛旽)스님이 배출된 절이라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술된다고 했던가, 조선 건국에 참여한 공신들의 역사왜곡과 역성혁명의 당위성을 위해 불교를 폄하하고 신돈의 개혁사상을 지우려고 절을 불태우고 그 흔적을 없애버렸다. 그 이후 700년 동안 절터만 덩그러니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깨진 돌탑과 나뒹구는 화강석 파편이 여기가 절터였음을 말해 줄 뿐이다. 인생무상(人生無想)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하지만 누구나 권력을 쥐게 되면 놓지 않으려고 한다. 초심을 유지하는 경우도 좀처럼 드물다. 권좌나 산이나 한번 오르게 되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산행을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20년 0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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