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본성과 비화가야의 부활
차하린 작가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20년 0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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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중순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가야본성(加耶本性) 기획전을 보기 위해서다. 서른여섯 군데나 흩어져 있던 가야 유물을 한곳에서 보게 되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시실 앞 커다란 포스터에는 가야본성(加耶本性)을 칼(劒)과 현(絃)이라는 두 글자로 함축했다. 가야는 42년 3월에 문화와 풍습이 서로 다른 작은 나라들이 모여 구지가 설화를 바탕으로 김수로왕이 탄생하면서 생겨났다. 신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520여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변국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막강한 기술로 철기문화를 꽃 피운데다 여러 가야의 화합을 위해 가야금까지 만들었으니 칼과 현은 환상의 조합이다 싶다. 전시실로 들어서니 캄캄한 길이 먼저 나왔다. 길 한쪽에는 까만 벽을 따라서 하얀 글씨로 쓴 구지가가 경건하게 나오니 어둠에 잠긴 길이 2천 년 전 가야 탄생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블랙홀 같았다. 길이 끝나고 안으로 들어서니 파사석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관룡사 약사전 앞 삼층석탑만한 붉은 돌탑이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로 올 때 배 중심을 잡기 위해 가져온 평형석이라고 했다. 일연스님도 삼국유사에서 우리나라에 없는 돌이라고 했는데 고려대 산학협력단의 분석결과도 한반도에 없는 엽랍석 성분의 사암이라고 판명 났다. 학자들 사이에서 허황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만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가야인 후손들은 허황후의 무엇을 그토록 잊지 못해서 그녀의 흔적을 석탑으로 남게 했을까. 열여섯 살 때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서 먼 바닷길을 건너 가야로 찾아온 그녀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긴 세월 동안 가야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 철의 강력한 힘뿐만 아니라 가야에 헌신한 허황후의 모태적인 힘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 같다. 고분은 그 시대의 풍습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다. 가야는 나라마다 고분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고 신분에 따라 부장품도 달랐다. 커다란 유리장 안에는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비화가야 나라별로 특색이 다른 토기들이 자신의 이름표를 달고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다른 전시실에는 철제 무기인 칼과 갑옷을 비롯해서 금관, 금귀고리, 수정목걸이, 유리잔, 청동거울, 쇠솥 등 저마다 이야기를 품은 유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가야는 바닷가에 자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무역이 활발해서 당대 최고의 국제시장이 형성되었다. 거기다 각 나라가 독자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런 연유로 고분에서 서아시아의 유리금박구슬과 더불어 중국, 일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가야의 유물도 일본과 신라 백제의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만큼 가야가 철기와 토기로써 번성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고령 지산동 44호 왕의 무덤은 실제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값진 꺼묻거리는 도굴되어 없었지만 녹슨 칼과 깨진 토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고분에는 왕의 호위무사와 신하, 일반인을 비롯해서 35명이 넘는 순장자가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가야에서는 왕이 죽으면 순장을 하는데 강압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순장을 결정했다고 되어있다. 그들은 왜 이승에서의 삶을 버리고 순장되기를 원했을까. 목숨을 버리는 두려움보다 순장을 하면서 얻는 사후의 명예가 더 중요했을까. 생사를 함께 할 만큼 그들의 왕을 사랑했기 때문일까. 송현고분에서 나온 송현이도 자기가 원해서 순장 되었던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대추나무 가지처럼 얽히고설켰다. 2년 전 창녕박물관에서 보았던 할 말이 많은 듯한 송현이의 애절한 눈빛이 떠올라서 전시된 순장자의 두개골과 유물 앞에서 얼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전시실은 기획전이라 공간이 크지는 않았다. 가야의 방대한 자료를 다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가야의 생성과 소멸, 가야인의 삶과 죽음, 예술, 문화를 들여다보았다. 가야는 여러 나라가 하나로 통합하지 않고 서로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 함께 공존하는 방식으로 살아간 나라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며 어우러져 살았던 것이 약점이 되어 중앙집권체제를 가진 신라에 합병되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가야 고분은 일제 강점기 때 거의 도굴이 되었다. 다행히 지난해에 창녕에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 가야시대 가마터가 발굴되었고 비화가야 최초로 교동 송현동 고분에서 도굴되지 않은 지배자의 무덤도 빗장이 열렸다.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타전 되면서 비화가야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천?5백 년 동안 잠자다 세상에 불려 나온 비화가야의 발자취가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어 할까. 그들은 가야의 영원을 꿈꾸었을까. 시공을 초월하는 삶을 간절히 바랬을까. 창녕에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이 약?250기가 된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인데 계성고분과 영산고분까지 합한다면 비화가야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비화가야가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서 부활을 하고 있다. 가야의 고유한 국가는 무너졌지만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소중한 유적을 지키는 것은 우리들 몫이다.
차하린《수필과비평》등단(2009)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부산수필문인협회 회원, 부경수필문인협회 회원, 경인수필과비평 회원, 제9회 부산수필문예 올해의 작품상 수상 |
창녕신문 기자 / cnilbo@hanmail.net  입력 : 2020년 0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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