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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창녕신문 |
| 세종11년(1429) 11월 11일 예조에서 전국의 영험한 곳에 제사를 드리는 치제를 건의할 때 영산현 계성의 기음강(岐音江) 용당(龍堂)이 나오는데 이는 양산의 적석용당(赤石龍堂)과 전라도 광주의 병로지용당(幷老只龍堂)과 더불어 전국의 3대 용당으로 영험하다는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음강(岐音江)은 영산현 서쪽28리에 있고 수령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데 축문에는“가야진 명소지신(伽倻津溟所之神)”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면 기음강(岐音江)의 가야진명소(伽倻津溟所) 용당(龍堂)은 어디일까?
“고려사”지리지 경상도 영산현 조(條)에는‘이 현(縣)에 온천(釜谷)이 있고, 가야진명소가 있다’고 전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경상도 영산현 산천(山川) 조(條)에서 기음강에 대해 설명하기를‘현의 서쪽28리에 있고 창녕현 감물창진의 하류인데, 의령현의 정암진과 합친다. 옛 가야탄(伽倻灘)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가야진명소(伽倻津溟所) 용당(龍堂):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창날 (추정)
여기서 의령의 정암진은 남강에, 창녕 감물창진은 낙동강에 위치한 나루이므로 기음강(岐音江)은 결국 두 강의 합류지점의 별칭(別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가야진명소는 용당(龍堂)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기음강용단(岐音江龍壇)이라고 불렀으며, 영산현 수령이 춘추로 치제(致祭)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의 영산현 편에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기강진(岐江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옛 가야탄(伽倻灘)”이라고도 하였다. 즉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마을은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이다. 용산본동이 큰 마을이고, 이밖에 작은 마을로 아곡, 창날, 안골 등이 있다. (전덕재 (慶州大)三國時代 黃山津과 伽倻津에 대한 고찰)
기음진, 즉 가야진은 창날마을에 위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근래에는 창나리, 창나루로 불렀고, 이것을 축약하여 현재 창날이라고 부른 것이다. 옛 부터 용의 알, 즉 여의주라고 불린 마을앞 똥뫼(獨山)에 제단이 있어 매년 봄과 가을에 용왕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가뭄이 들 때면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의 기음강용단(岐音江龍壇), 고려시대의 가야진명소(伽倻津溟所)에 해당한다. 독산(獨山)은 용이 사는 형상이라고 하여 마을이 항상 흥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야진(기음진)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했다. 그곳은 창녕군과 함안군, 의령군 3개 군의 경계점인데, 거기서 배를 타고 남강(岐音江)을 거슬러 올라가면, 함안군과 의령군을 지나고, 더 나아가면 진주에 이른다. 정암진(鼎岩津)에서 내려 육로로 가면, 합천군 삼가면과 합천읍에 다다를 수 있다. 이처럼 가야진이 낙동강 수로의 요지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시대에 그 근처에 용당(龍堂)을 건립하고 세곡을 운반하는 선박과 선원의 무사안전을 기원하고 홍수로 인한 범람의 피해를 없게 해달라고 용신(龍神)에게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남중희 (창녕문화원향토사연구부소장) 이처럼 역사적으로 유구하고 영험있는 가야진명소(伽倻津溟所)인 기음강용단(岐音江龍壇)을 발굴․복원하고 이 참에 창녕, 함안, 의령 3개 군의 지자체장이 모여 가야진명소(伽倻津溟所)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치제(致祭)를 올리는 행사를 하게 된다면 남지의 유채축제와 더불어 또 하나의 창녕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