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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洛東江)이라는 이름은 원래 상주의 옛 지명인 낙양(洛陽),?상낙(上洛)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혹자는 낙동강(洛東江)의 낙동(洛東)이 가야의 터전이었던 김해,?함안,?고령,?함창 등?낙동강의 서쪽 지역에 가야가 있어서?가락(駕洛 가야)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낙동강(洛東江)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연려실기술 별집」등을 보면?가야의 주 근거지인 김해와 양산지역에서는 낙동강(洛東江)을 낙동강으로 부르지 않고 황산강(黃山江)?또는 가야진(伽倻津)이라고 부른다.
임경대에서 바라본 황산강(낙동강) 황산강이 품은 첫 번째 나라는 가야였다. 황산강은 삼랑진에서 무척산을 휘돌아 원동에 이르고 임경대를 거쳐 신어산 자락을 우회하면서 물금을 지나 서쪽은 대동수문(大東水門)을 거쳐 바다로 흘러들고,?본류는 남하하여 부산 명호도(鳴湖島)와 사하구 하단동 사이 하구갑문을 지나 남해로 흘러들면서 서강과 만나는 형국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개벽(開闢) 후 이 땅에는 나라의 호칭이 없었고 군신(君臣)의 칭호도 역시 없었는데, 이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9간이 장(酋長)으로서 백성을 다스렸으니 모두 100호(戶) 7만 5000명이었다. 산야에 도읍하고 우물을 파마시고 농사를 지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일찍 부국가의 틀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착세력에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의 세력을 빼어낸 것은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모 18년 4월, 서력 42년이다. 가락국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북쪽에 위치한 구지봉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인기척이 들렸다.”무리 3백명이 구지봉으로 몰려드니 형체는 없고 소리만 내어 말하였다.“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구관들이 대답했다.“우리들이 있습니다”사람소리가 말했다.‘내가 있는 이 곳을 무엇이라 하느냐?”구관들이 대답했다. “구지봉이라 합니다”그러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하느님께서 내게 명하기를 임금이 되어 이곳을 다스려 나라를 새롭게 하라 이르셨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마땅히 땅을 파며 이렇게 노래를 불러라”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 잠시 후 머리를 들어보니 자줏빛 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끈이 닿은 곳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빛 상자에는 둥근 황금알 6개가 있었다. 모두들 놀라 기뻐하며 함께 100번 절을 했다. 알에서 태어난 동자는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이 되었고,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는데 처음으로 나왔으므로 이름을 수로라 하고 나라 이름을 대가라 혹은 가야국이라 일컬었다. 수로왕은 신답평(新沓坪)에 행차하여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고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곳은 협소하기가 마치 요엽(蓼葉)과 같다. 그러나 빼어나게 아름다워 16나한(羅漢)이 머물 만한 곳이다. 며 도읍을 정하였다. 1991년 2월 9일 대성동 제29호 고분에서 출토된 오르도스 형 청동 솥(동복)과 말을 탈 때 바람에 흩날리는 옷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허리에 찼던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인 호형대구가 출토됨으로서 이 곳에 나라를 세운 이들은 오르도스 즉 내몽고에서 말을 타고 유목생활을 하는 기마민족과 맥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지역에 있던 유목민족들이 부여를 거쳐 한반도 끝자락에 정착해 있던 세력들과 규합하여 가야를 건국하게 되었고 이 들은 황산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가야의 연합체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금관가야는 철 생산을 기반으로 아유타국의 허황옥과 국제결혼을 하는 등 번성기를 누리다가 AD400년 (광개토대왕 10년) 고구려의 신라를 구원하는 전투를 치른 후에 쇠락의 길을 걷다가 AD 532년(법흥왕19년) 신라에 복속되었다. 수로왕이 즉위한 서기42년 (동한 東漢 건무18년)부터 구형왕까지를 계산하면 존속기간이 490년이 된다. 말하자면 낙동강이 품었던 첫 번째 왕국이자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500여년 간 번성한 국가 금관가야(伽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