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희
남해안 일대에는 기원전부터 소규모의 도읍 국가들이 제각기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삼한 시대의 소국들이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설치되고 이들의 교역이 이루어 지면서 도읍 국가들은 새로운 문물을 교류하면서 변화와 발전을 꾀하게 된다. 이들 소국들은 내륙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비교적 선진문물을 일찍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선진문물들을 기반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서기 2년 이 도읍국가들 중 변진 구야의 9간이 모여 수로를 왕으로 추대하여 금관가야라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태동시킨다. 금관가야의 태동 시에도 포상팔국으로 일컬어진 도읍국가들은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토착세력으로 성장 중이었다. 이에 금관가야 및 아라가야 등 6가야의 등장은 이들 포상팔국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결과적 전쟁에 이르게 된 것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포상팔국(浦上八國, 201~212년)의 난’이다.
<삼국사기> 서기 209년 (내해 이사금14) 7월에 포상팔국이 가라를 침입하니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내해 이사금의 왕자인 날음은 태자 우로와 함께 6부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포상팔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노략한 가라인 6,000여 명을 빼앗아 돌려보냈다.
<삼국유사 물계자 전> 서기 212년 (내해왕17년) 보라국, 고자국(고성), 사물국(사천)등 팔국이 힘을 합해 아라국을 침략하므로 왕이 태자 이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팔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 물계자의 군공이 으뜸이었다.
포상 팔국의 난은 당시 금관가야와 아라가야 등이 해상무역을 장악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해상국가들이 강력하게 저항한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전기 가야 연맹의 발전의 원동력은 낙랑군을 통한 원거리 교역을 통한 문물의 교류와 및 왜와의 교역이었는데 313년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게 멸망되자 문물교류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포상 8국이 연합하여 운명을 걸고 대규모로 가야국(김해, 함안)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교역상 갈등이나 경쟁 관계가 아니라 문화적 단절에 대한 다급한 환경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급격한 국제 질서의 변화 속에서 숙명적 대결이 전쟁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고, 그러한 상태를 야기할 만한 사건은 4세기 초 낙랑군, 대방군 멸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진 변한 소국을 비롯한 세력들은 그때까지 축적된 국력을 토대로 각지에서 자기 지역 기반을 중심으로 통합하여 덩치를 키우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가야연맹체의 출현으로 남동부의 분열과 통합을 경험하게 된 것이 포상 8국의 난으로 비화 된 것이다. 낙랑군의 멸망으로 인하여 한반도 남부에 변화가 초래되고 있을 무렵 낙랑 · 대방군을 소멸시킨 고구려는 옛 대방지역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 남부까지 영향을 미쳐 신라와 가야는 다른 방향으로 분기되어 나간다. 즉 경주세력은 진한의 맹주 역할을 계속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부용이 되어 그 제도 및 문물을 수입하여 주변의 다른 소국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기 지역에 대한 통솔을 더욱 공고히 해나갔고, 김해세력은 혼란을 수습하고 낙랑 · 대방 대신 백제와 교역을 강화하면서 지역 패권을 장악하고 왜와의 교역을 강화해 나갔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보이는 계통 유물이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이러한 활발한 움직임들이 포상 8국의 생존을 위협하여 전쟁으로 촉발하게 되었으나 신라의 도움을 받아 진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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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73호 수로왕릉(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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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73호 수로왕릉(김해) 이 전쟁을 통해 확실한 것은 가야제국 내 전쟁이 금관가야가 가야제국들이 아닌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통해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가야연맹설’이 허구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즉 가야제국의 관계가 동일한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공동운명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도 유추해볼 수 있다. 서기 209년에 일어난 이 ‘포상 8국의 난’은 금관가야가 경주 신라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 화친관계를 맺게 되어 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가야의 구심체의 위치를 상실한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