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八代市)에 있는 야쓰시로 신사에는 묘견궁이라는 곳에서 묘견공주를 모신다. 이 묘견궁은 천무 천황 재위 시절인 795년 세워졌다. 야쓰시로 신사 본궁 정문 처마 끝에는 몸은 거북, 머리는 뱀의 형상을 한 전설 속의 구사와(龜蛇瓦)인 현무가 있다. 그리고 기와지붕 꼭대기에는 머리는 용의 형상이며 몸체는 물고기로 만든 한 쌍의 쌍어(雙魚)문양이 있다.
혼슈 미에현(三重縣) 이세시(伊勢市) 이세신궁은 메이지신궁 우사신궁과 함께 일본의 3대 신궁으로 내궁인 황대신궁에선 묘견공주를 천황가의 조상으로 모시며, 아마테라스오호가미(天照大神 : 태양신, 천황가조상신)라하여 모신다. 묘견(妙見)공주는 김수로왕의 둘째 딸로 비정되며 야마대국의 여왕 묘켄공주, 히미코, 비미호로 불려지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신공왕후, 삼국유사에는 세오녀(細烏女)로도 표기되어 있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는 난생녀(卵生女)로 기록되어 있다. 히미코가 서기 148년부터 서기 247년까지 99년동안 살면서 서기 179년에 야마대국의 여왕에 올라 69년간 왕의 자리에 있었으며 무녀(巫女)로서 그녀의 곁에는 항상 남동생이 있어 국사를 보좌하였다고 삼국지 위지 왜인전(倭人傳)에 기록하고 있다.
야쯔시로의 묘켄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대목이 중요한데, 비미호와 관련되어서는 직접적으로 바다를 건너왔다는 기록은눈에 띠지 않는다. 하지만 비미호가 한반도 국가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우선 그녀에 대한 주변국의 기록 중에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서기 173년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중국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243년보다 70년이나 앞선 연대이다. 비미호가 세웠다는 국가인 야마대국이 채 안정이 되기 전에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공식적 외교 이상의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한다. 이외에도 가야세력의 일본진출을 증명하는 자료는 많이 존재한다. 큐슈 남쪽의 미와자키현에는 일본 천왕가의 발상지라고 불리우는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있다. 이곳에 일본 천왕가가 다녀갔다는 기념식단이 있고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철모와 경상북도 고령 지산동의 가야 철모와 동일하다.
사이토바루 고분 또한 한반도 남부의 경상남도 고성, 전남 월계동에서 동일한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이고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에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발견된 철모와 빼다 박은 사이토바루 철모의 모습을 통해서도 일본 천왕계의 뿌리는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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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에도 기타큐슈의 지역에서 많은 가야계 철갑옷과 큐슈지역에서 발견되는 가야계 청동기 등은 가야세력이 일본에 진출하였음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1999년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야마토 천왕의 상징인 파형동기가 발견되자 일본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천황 무덤에서만 발견되었던 파형동기가 금관가야의 지배자 무덤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본 에가미 교수가 주장하는 고대 일본 민족의 원형은 북방 기마민족이며 이 민족은 가야를 거쳐 일본으로 남하했다는 주장이 사실임이 드러난 것이다. 즉 고대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간 세력이 고대일본을 통치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파형동기는 야요이시대 후기인 서기 1세기경부터 큐슈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제작되기 시작하여 3∼4세기 야요이시대 후기에 이르러 긴키〔近畿〕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실제 대성동 고분군에 나타난 파형동기가 일본에서 출토된 것보다 1세기 정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가야세력이 큐슈를 통해 일본 열도로 이동한 유력한 증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