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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창녕신문 |
| 우리나라 5천년 歷史를 기술한 ‘이야기 韓國史’를 읽다보면 ‘한국의 政治史는 피의 歷史’임을 실감한다. 잦은 政變과 숙청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당대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적폐청산(積弊淸算)으로 옥사를 겪었다. 적폐청산(積弊淸算)은 오랫동안 쌓인 폐단, 즉 잘못된 관행, 부정부패, 비리, 악습 등을 깨끗이 해결하여 씻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국가의 근간인 기본과 원칙, 정의와 법치가 바로 서야한다는 사실에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과거에 너무 집착하는 개인이나 국가는 미래가 없다. 비전을 가진 미래지향적인 사고가 절실하다. 사실 한국의 現代史를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성취했다. 이미 세계 10대 경제대국 대열에 진입하였고, 21세기 세계 중심국가로 성장한다는 것이 미래학자들의 예측이다. 36년간 국권을 상실한 일본 강점기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세계의 식민지 국가 85개국이 세계 2차 대전 연합국의 승리로 독립했지만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인의 저력은 民草들의 忍苦의 삶에서 발휘되었다. (사진 : ‘신돈과 창녕, 개혁의 길‘ 학술대회)
650년 전 고려말 공민왕의 신임을 받은 王師로 6년간 정치 개혁을 시도하다 권문세가의 저항으로 사형당한 창녕 계성 옥천사 노비출신 편조대사 신돈(辛旽)의 사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사)신돈사상연구회(회장 신용태)는 지난 11월 24일 창녕군청 3층 대회의실에서 ‘신돈과 창녕, 개혁의 길‘ 학술대회를 한국중세사학회 주관으로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신돈이 추진한 개혁정치의 본질은 愛民思想에 있다.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해방, 남녀평등을 시행하자 성인으로 칭송받았고 그의 치열한 삶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여정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고,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고, 남녀 차별이 없는 시대를 열고자 했다. 신돈(1322-1371)에 대한 功過는 많은 논란과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백성들이 신돈의 개혁에 열광하며 성인으로 추앙한 사실에 주목하여 고찰하며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토지제도 개혁과 노비문제를 급진적으로 해결한 것은 혁명적인 개혁이었다. 권문세족들이 백성들로부터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신분을 개경(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 만에 돌려주기 않으면 엄벌에 처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주도한 점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모함으로 바로 신돈은 생명을 잃었고, 3년 후 개혁의 생사를 서약한 공민왕도 신하의 칼에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고려 말 신돈에 의한 강력한 개혁정치, 그리고 정몽주,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의 등용이 없었다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회군과 역성혁명(易姓革命) 조선왕조의 개국도 없었을 것이다. 歷史는 勝者의 記錄이다. 조선왕조의 출범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돈의 개혁정신과 애민사상은 묻히고, 신돈에 대한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일탈행위만 부각되는 것은 아닌지? 과연 신돈이 추구한 개혁 정치의 정신, 그 본질은 무엇인지? 후세 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재조명해 나가야 할 때이다.
(논설주간 윤수근) |